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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부정공>인현(寅鉉)配 유인진주강씨행록(孺人晋州姜氏行錄)
(부정공후)21世인현(寅鉉)配 유인진주강씨행록(孺人晋州姜氏行錄) 皇祖妣姜氏籍晋州文良公諱希孟后在允女 哲宗辛亥十月一日生天姿幽閒貞淑夙講閨範之柯則通敏女工之可習孝於父母友于昆季未笄己著茂德年十七歸于我王考(諱寅鉉)孝奉嫜姑極盡甘旨之供事君子能致賓敬之禮年至三十夫君偶然得病三年呻吟問醫求樂靡不用誠少無奏效築壇後園每夜禱天願以身代三年如一日天理難斟竟遭城崩即甲申四月七日也膝下惟有六歲孤兒亡念慈愛之情不甚號哭誓以從逝夫君瞑目復開執手戒之曰我是不肖夭逝君若下從則仰事附育誰將任之不負我心贖我泉坮不孝不慈之罪語終永訣孺人遂收涙歛容慰其舅姑喪葬祭奠一遵禮制竭力奉親以義訓子行有餘力織紝紡績夜以繼日喫苦蓄積先奉祭田接人以惠御僕以因心周貧賑乏遠近不吝者盖孺人之好施之天性也庚戌國耻後彼輩稱以優差饋賜賞物孺人勃然作色而拒之曰死惟輕也豈受倭奴不義之賞乎速速收退云其使赧然而收去乙亥炎暑偶有不安節終至沈痼一日執先妣金氏手而言曰茹冤歲月遽作衰暮苦樂永忘今焉而己愛我賢婦恤我兩孫善育善導勿墜家聲言訖長逝即乙亥八月二十五日也葬于堂頭山初谷艮坐原嗚呼孺人之節孝懿蹟曾有面鄉之公評詳載寰輿誌及誌及道誌三綱錄等書小子何敢更贅然孺人養舅姑極致婦道敎子克盡慈愛終就大成者不負王考之遺託也臨終喻先妣而託吾兄弟之善導不墜忠孝之家聲者盖皇祖妣式躬宜家之遺德永世宜室之餘慶此乃吾家内則之垂後世不敢歸於泯沒故忘儧畧述以俟立言者取捨焉 不肖孫 東潤 謹書 (부정공후)21世인현(寅鉉)配 유인진주강씨행록(孺人晋州姜氏行錄) 할머니 진주강씨(晋州姜氏)는 문량공(文良公) 강희매(姜希孟)의 후손인 재윤(在允)의 따님이시다. 철종(哲宗) 신해년(辛亥年: 一八五一) 十월 一일에 출생하셨는데 천품(天禀)이 유한(幽閒) 정숙(貞淑)하셨으며 일찍이 규범(閨範)을 닦고 바느질과 길쌈을 잘하셨다. 또 부모님께 효도(孝道)하고 형제들과 우애(友愛)하여 혼인하기 전에 이미 훌륭한 덕성(德性)이 드러났다. 나이 十七세에 우리 할아버님(諱 寅鉉)께 시집오시어서는 시부모님을 극진한 정성으로 받들어 맛있는 음식을 떨어뜨리지 않으시고 남편을 손님처럼 공경하였다. 부군(夫君)이 나이 三十세에 우연히 병환이 나서 三년 동안 병석에서 신음(呻吟)하게 되자 갖은 방법으로 훌륭한 의원(醫員)과 약(藥)을 구하는 등 정성을 다하셨으나 효험(効驗)이 없었다. 그러자 후원(後園)에다 단(壇)을 쌓고 밤마다 하늘에 자신이 대신 죽겠다고 빌었다. 이렇게 三년을 하루처럼 빌었으나 하늘의 뜻은 알기가 어려워 마침내 돌아가시니 바로 갑신년(甲申年) 四월 七일이었다. 이때 슬하(膝下)에 여섯 살 난 어린 아들이 있었으나 할머니께서는 돌볼 생각을 하지 않고 심하게 울지도 않으면서 따라 죽기를 맹세(盟誓)하셨다. 그러자 할아버지께서 감았던 눈을 다시 뜨면서 손을 잡고 경계하시기를 「나는 불효(不孝)하여 일찍 죽지만 당신마저 나를 따라 죽는다면 부모님은 누가 모시며 아이는 누가 키우겠소. 부디 내 부탁을 잊지 말아 아들 노릇을 못 하고 아비 노릇을 못 하고 죽은 내 죄를 용서받게 해주오.」 하고 말을 마치자 운명하셨다. 이에 할머니께서는 눈물을 거두고 몸을 추스린 다음 시부모님을 위로(慰勞)하고 상례(喪禮)와 제사 등을 예제(禮制)대로 마쳤다. 이후 힘을 다하여 시부모를 모시고 의리(義理)로써 아들을 가르쳤으며 시간이 있으면 틈틈이 길쌈을 하면서 밤을 지새우셨다. 갖은 고난을 다 겪으면서 재산을 모아 먼저 제위토(祭位土)를 장만하셨으며 남을 대할 때는 은혜(恩惠)로, 하인(下人)들은 너그럽게 거느렸으며 원근(遠近)의 가난한 이웃을 두루 구제(救濟)하셨으니 이는 천성(天性)이 베풀기를 좋아하셨기 때문이다. 경술년(庚戌年) 국치(國恥: 韓日合邦)를 당한 후에 왜인(倭人)들이 노인을 우대(優待)한다면서 물품과 상(賞)을 내리는 일이 있었다. 이때 할머니께서는 발끈 화를 내 거절하면서 말씀하시기를 「한 번 죽는 일은 아무것도 아니다. 어찌 왜놈의 의롭지 못한 상을 받겠느냐? 어서 가지고 가거라.」 하시니 심부름을 온 사람이 부끄러워 얼굴을 붉히고 가지고 돌아갔다. 을해년(乙亥: 一九三五) 더위에 우연히 병을 얻어 침중(沈重)하게 되셨다. 하루는 할머니께서 우리 어머니 김 씨(金氏)의 손을 꼭 잡고 말씀하시기를 「원수 같은 세월이 흘러 이제 늙어 괴로운 일도 즐거운 일도 다 잊고 죽게 되었구나. 나의 사랑하는 며늘아, 부디 내 손자(孫子)들을 잘 가르치고 길러 집안의 명성(名聲)을 실추(失墜)시키는 일이 없도록 하거라.」 하시고는 돌아가시니 이때가 바로 을해년(乙亥年) 八월 二十五일이다. 당두산(堂豆山) 첫 골짜기 간좌(艮坐)언덕에 장례하였다. 아 할머니의 절효(節孝)와 아름다운 행적은 일찍이 면(面)과 향리(鄉里)의 공론(公論)이 있어 「환여지(寰輿誌)」와 「도지(道誌)」·「삼강록(三綱錄)」 등의 책에 수록되어 있으니 이 손자가 감히 무슨 말을 덧붙이겠는가? 다만 할머니께서 시부모님을 잘 모시어 며느리의 도리를 잘하고 아들을 자애(慈愛)로 잘 가르쳐 대성(大成)시킨 것은 할아버님의 부탁을 저버리지 않은 것이며 임종(臨終) 때 어머님께 우리 형제를 잘 가르치고 인도하여 충효(忠孝)의 집안 명성을 실추시키지 말라고 가르치신 것은 집안의 유덕(遺德)을 본받아 영원히 여경(餘慶)을 전하라는 것으로 우리 집안에서 후세까지 전해 사라지게 하지 말아야 할 가르침이기 때문에 감히 외람됨을 잊고 대략 기술하여 후일의 훌륭한 분이 취사(取捨)하기를 기다리는 바이다. 불초손(不肖孫) 동윤(東潤) 삼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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